00:00:00
시청자 여러분 우리 김문수 후보의 부인입니다. 이게 대통령 후보 부인이니까 호칭을 제 사석에서는 형수님 그러는데 오늘은 방송에서는 여사님이라고 제가 호칭하겠습니다. 설난영 여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저희 방송 처음이시고 거의 방송 그동안도 안 하신 것 같은데요. 네 처음입니다. 우리 자유파 국민들과 시청자들께 짧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여러분 이 영상을 통해서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예쁘게 많이 봐주시고요. 기호 2번 김문수 잘 부탁합니다. 아니 기호 2번 김문수 이거 연습하신 거예요? 저는 그냥 김문수는 속 속도전에서 약간 떨어지지만 저는 약간 빠르답니다. 김은수 후보가 꼿꼿하고 정말 대쪽 같고 그런데 좀 약간 좀 느린 게 금이긴 해요. 그게 아마 이제 영천 지역의 양반 집안의 그런 특성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젊지 않고 느리고 그게 아마 말도 그렇고 행동도. 도망다닐 때는 아마 빨랐단 말이에요. 아니 요새는 제가 김은수보다 가끔 짧은 거리 걸어갈 때 있으면 엄청 걸음이 빨라요. 그러게 말이에요.

00:01:31
평소에 두 분이 어디 외출하실 때 저 김은수보다 혼자 멀리 가고 뒤에서 막 쫓아가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네 그러긴 하는데 요즘에는 이제 많이 나아져서 사랑하는 아내를 곁에서 잘 에스코프해서 그렇게 갑니다. 제가 그동안에 수십 년 지적직을 했더니 많이 달라졌어요. 문수가 많이 달라졌어요. 문수가 많이 달라졌어요. 두 분이 호칭은 뭐라고 그래요? 그냥 통상적으로 여보. 그래요? 문수야 이러지는 않고요? 제가 가끔 복태야 그러거든요. 복태? 네. 태어날 때부터 복을 안고 태어난 사람 아닌가. 그래서 복태라고 가끔 애칭. 복태라는 애칭을. 네. 제가 쓰죠. 그럼 후보는 우리 사모님한테 여사님한테 뭐라고 그래요? 그냥 제가 애칭으로 얘기할 꼬리가 없어 보이잖아요. 이쁘나 그럴 수도 없는 거고. 두 분이 한 50년 전에 만나셨나요? 이제 저희가 결혼한 지 42년 됐으니까 45년 정도 된 거 같아요. 연애 결혼하신 거죠? 그때 어떻게 시작되셨어요? 처음에 노조는 제가 먼저 시작을 했거든요. 그러셨구나. 저도 사실 노조라는 노자도 몰랐다고 자꾸 제가 말씀을 드리는 건데요.

00:02:58
어느 날 갑자기 구로공단이라는 공단을 알게 됐고 그리고 거기서 여성사업장에 잠깐 취업을 해서 거기서 또 갑자기 노조를 맡게 됐어요. 세진전자. 세진전자. 세진전자가 노조가 생긴 게 아마 1년 가까이 됐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저희 전임 위원장이 회사를 퇴사를 하게 됐는데 저한테 와서 노조를 당신이 맡아서 하면 참 잘할 것 같다. 그래서 사실 저는 그분도 잘 모르고 그냥 그냥 안면 정도였는데 처음에 제가 거절을 많이 했죠. 난 노조의 노자도 모르고. 나는 자신이 없어서 안 한다고. 그래서 한 일주일 정도를 거절을 하다가. 이제 그 이후에 제가 승낙을 하게 됐죠. 그러면 김은수 후보는 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졸업은 그때 안 했었죠. 서울대 다니다가 재적당하고 막 이러고. 노동 운동을 하려고 위장 취업을 해서 노동자가 된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 여사님은 아예 처음부터 노동자셨군요. 노동 운동을 하려고 공장에 들어간 게 아니고. 저는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공부를 하다가 실패를 했죠 처음에.

00:04:16
그리고 한 두 번 세 번 서울에 상경해서 친척 집에서 학원을 좀 다니다가 계속 대학을 가려고. 그런 차제에 구로공단을 접하게 된 건 저희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거기를 소개 받게 됐거든요. 그래서 그래 공단에 한번 현장을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한 두세 달 한두 달 이런 식으로 설정을 해서 제가 현장에 들어간 게 된 거죠. 그러면서 그 속에서 제가 노조 현장 제안을 받고 거기서 노조를 알게 되고 제가 나름대로 신념이 생긴 거죠. 내가 열심히 하니까 그 나름대로 제가 열심히 했었죠. 잘 돼 있는 노조 사업장을 많이 찾아다니고 저희 상급 단체에 가서 또 조직에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공부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회사와의 교섭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조합원을 위해서 그런 권리를 찾게 되니까 이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보람을 느꼈어요. 그리고 우리 사업장이 환경도 개선이 되고 또 자기 생활이 좀 나아지잖아요. 아무래도 인근이라든가.

00:05:34
그래서 그때 우리가 주장했다는 것은 노동상권 보장하라. 휴일을 쉬게 해달라. 그리고 여성들 같은 경우는 생리휴가. 그때는 생리휴가도 거의 없었거든요. 생리휴가도 보장하라. 그래서 그런 것들을 주장하면서 하나하나 이게 성취가 되니까 제 나름대로 굉장히 신념이 생겼어요. 세진전자가 제가 자료를 확인해 보니까 근로자가 1500명 되는 굉장히 규모가 큰 회사였더라고요. 그렇죠. 규모가 컸었죠. 1500명의 노조위원장을. 제가 대단하죠. 근데 저희가 생산품이 전부 다 100% 일본으로 수출하는 그런 일본인 업체였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신념이 생기고 나는 결혼하지 말고 정말 이 일이 굉장히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결혼하지 말고 평생 이 일을 해야지. 제 나름대로 공부고 뭐고 그냥 신념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아예 대학을. 그것도 이제 포기를 하고. 그러면서 뭐라 그럴까. 제 나름대로 이 노조운동이라는 거에 중요성. 지금 노조운동은 완전히 다르죠. 그때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지금 정치투쟁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00:06:48
지금의 민노청하고는 완전히 다른 진짜 근로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의무를 위해서 소위 생활형 생활 밀착형 노조 그러다가 김문수 후보를 만나셨는데 그리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그때 어느 날 상급단체에서 가 있었는데 우리 김문수 후보가 왔어요. 그때 첫 대면을 했는데 그때 한일 도로코 작업복이 청색이었어요. 우리 고 박사님 입고 계신 것보다 약간 더 밝은. 근데 청색이 굉장히 어울리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얼굴도 보면은 그때 막 세안을 바로 하고 난 상태처럼 아주 그 환한 깨끗하고. 깨끗한 아주 그런 느낌. 그런 느낌. 머리는 이제 팔대기 가르마를 쫙 하고 저거처럼? 아 이거는 좀 괜찮아요. 이거는 이제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여러 면에서 지금 이제 주름만 있지만은 여러가지 그 여타 다른 부분들은 좀 더 세련됐어요. 지금이 봐주면 하고요. 봐주면 하고. 그때는 약간 촌스러우면서도 또 이대팔 가르마에다가 동백기름까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그런 거 있잖아요. 아니 그게 한 45년 전인데 그런 걸 디테일한 걸 다 기억하세요?

00:08:14
딱 보는 순간이 이제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사실 뭐 촌스럽다는 것은 다 촌스럽잖아요. 뭐 이렇게 패션업으로 하는 게 별로 없잖아요. 더더구나 노조를 하신 분들은 다 그렇죠. 근데 이제 거의 사업장에 보통 노조 위원장들은 삼십 대 사십 대 오십 대 주로 이제 그런 남성분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새로 신선한. 아주 뭐라 그럴까 따끈따끈한. 그때 20대였겠다. 20대 저희가 저는 중반 중반에서 약간 벗어난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저희가 가장 젊었죠 어떻게 보면. 그래서 저희는 지역 지부에 제가 여성 부장 우리 김부수 씨는 청년 부장해서 직책을 맡고 같이 활동을 했는데 어쨌거나 그 첫 느낌은 굉장히 스마트하면서도 프레시한. 그런 느낌. 네. 비록 촌스러울지라도 그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럼 그때 서울대생 서울대 다니던 사람이라는 건 모르셨고. 그거는 이제 그전에 누가 알았어요. 그래가지고 우리 몇몇 사람은 알고 있었죠. 그래가지고 처음에 왔는데 그때는 이제 우리가 딱히 줄 게 없잖아요. 그럼 이 주머니에다가 늘 껌을 많이 넣고 다녀요.

00:09:27
그래가지고 그걸 하나씩 다 줘요. 그래가지고 사람들이 그 꿈에 감사하죠. 당시에는 꿈도 귀했으니까. 줄 게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게 기억이 나고 그때도 보면 아주 자신만만하게 너무나 당당하게 그 사무실 문을 딱 열고 들어오는데 그런 느낌을 제가 받았던 거고 그래서 조금 젊으신 분이 와서 뭐랄까 사무실 자체가 환한. 한눈에 반하셨네. 그때는 제 느낌은 저보다 어리게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아마 정신적으로 성숙하다 할까 우리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서 약간 성숙하잖아요 그건 있어요 어리게 생각이 들고 그랬어요 그때는 이성적인 감정 그런 것보다는 젊은 사람이 한 사람 노조를 같이 할 사람이 들어오니까 그래서 여성 부장 청년 부장 그러다가 어느 날 저한테 청혼을 하는 게 연말이었어요 연말인데 여성부장이니까 제가 아무래도 식탁 같은 거 치우고 이제 사업장으로 들어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저보다 먼저 나왔거든요. 제가 뒤에 정리를 하니까 맨 나중에 나갈 거 아니에요.

00:10:46
그래서 저는 이제 사업장에 들어가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이렇게 서 있었는데 갑자기 태어나서 솔련장 저기랑 차 한잔하자고 저는 전혀 그런 어떤 이성적인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동안에 저희가 교류는 계속 했거든요. 우리가 젊으니까 그쪽 간부 우리 간부 같이 그냥 노동법 공부도 같이 하고 또 단합대회 같은 거 야외로 단합대회도 가고 그래서 굉장히 서로 상호작용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래서 그 가까이 있는 찻집에 이렇게 차를 시켜놨어요. 그리고 이제 대뜸 하는 말이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오는 게 어떠냐. 뭔 소리야. 경상도 남자 그런 거 아니에요? 뭔 소리가 아니라 당사자. 아니 경상도도 다 그렇지가 않아요.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오는 게 어떠냐.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시집 오는 게 어떠냐. 그래서 정말 자존심이 상했죠. 그렇지. 왜냐하면 우리 여성들이 20대는 자기가 최고잖아요. 그게 내가 어떻게 생겼다. 이름을 떠나서 다들 자기 자신이 최고의 정점에 있는 시기가 20대 중반 아니겠습니까.

00:12:07
그러고 있는데 더더구나 나는 노조운동에 맛을 들여서 나는 결혼 안 하고 평생. 나는 이 일을 해야 되겠다고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안 하죠 결혼은. 뿐만 아니라. 그런 그 청혼을 했다라는 거는 정말 제가 기분 나빴. 아주 모욕적인 거로. 표현을 했다면 그냥 귀를 귀싸대기로 아주 훔치고 싶더라고요. 제가 노조를 하기 전에는. 정말 여성 여성 그런 여성이었답니다 지금 생긴 게 나이가 이제 이 정도 되는데 이 정도 예쁘면 여성 여성 하세요 그때는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런데 노조를 하게 되면 이제 그런 성품이 약간 변해요 부드럽고 이게 뭐랄까 좀 그런 성품만 가지고 오는. 그 회사와의 대적 관계에서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자기 스스로가 강해져야 되고 자기 스스로가 좀 세워져야 된다는 그런 것들을 그럴 수밖에 없어요 또. 그래서 이제 그 속에서 단련된 아마 강철이 되어있는가 봐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00:13:17
그래서 이제 나는 이제 신념을 가지고 정말 현장에 있는 이 많은 노동자들을 위해서 내가 평생을 바쳐야 되겠다고 아주 신념이 그냥 부글부글한 열정에 들던 그런 상황이었는데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오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주 기분이 나빠가지고 뭐 어떻게 저도 이제 강해진 상태죠. 거기서 뭐 딱 할 수 없는 거고 거기서 또 저는 또 유연하기도 해요. 제가요. 노조운동에 맛을 들여서 평생 나는 결혼을 안 하고. 노동자들을 위해서 살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결혼은 안 할 거라고 그래서 아주 정중히 거절을 해서 속은 부글부글해도 참으면서 상당히 매너있게 거절을 했죠. 그랬더니 이 자리에서 당장 답변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누가 누구에게 시간을 줘요. 아주 그냥 건방지게 거지 없어요. 생각은 내가 하는 거고 아주 뭔가 본인이 그런 어떤 혜택을 주듯이 마치 제가 보기에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발언을 계속 아주 그래서 그 이후에 저희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계속 같이 하니까 삼각단체에서 그랬더니 슬쩍 저한테 또 그래요.

00:14:47
생각이 받느냐 그래서 아 똑같다. 그리고 우선은 이제 흐지부지 아니 흐지부지가 아니라 한 1주 2주가 지났어요. 그러다가 그때 그 해 1월 그 다음에 1월 4일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행불이 됐어요. 행불이 돼가지고 막 난리가 난 거예요. 자기 사업장뿐만 아니라 이제 상급단체 온 뭐 하여튼 그때는 가끔씩 의문사 당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행불이 돼가지고 이제 뭐 여기저기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있다가 이제 경찰이나 아마 그 지금 같으면 안기비 쪽 같아요. 거기서 이제 연락을 했죠. 이 사람은 지금 남양동 대공 분실에서 간첩 그 접선 혐의로 지금 조사를 받고 있다. 남양동 대구 네. 저도 거기에 이십삼일 잡혀 있었어요. 아 그러셨어요. 네 전두환 때. 네 그때 그렇죠 그러니까 팔십 년 일월 일월 사 일이었거든요. 근데 이제 혼자만 들어간 게 아니라 이제 얘기를 들어보니까 학교 다닐 때. 과학 사회주의라는 서클이 있었어요. 그 서클이, 그게 이제 과사. 공부하는 서클인데 그 서클 멤버가 70여명이었던 것 같아요.

00:16:07
선배, 후배 해서 근데 그 동시에 그 70명이 한 날 한 시에 동시에 싸그리 다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먼저 들어가고 이러면 이게 안 맞을 수 있잖아요. 여기서 또 누구 대라고 그러고 막 그러면 힘들어 지는데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을 거 그니까 그 뒤에서 이제 이 사람들이 대공보실 요원들이 다 파악을 한 거예요. 고성국이 뭐 누구 뭐 다 파악을 하고 있다. 한 달 한 시에 이 사람들 일망타진을 그냥 하다 싶어 해서 70명이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고문당하고 두들겨 맞고 온갖 회유와 설등 이런 걸 조사를 했겠죠. 그러다가 이 70명이 40일 동안 있다가 동시에 무혐의로 나왔어요. 전혀 아무런 단순하게 이거는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그래서 그래 불과하다. 근거도 없고 사실. 그래가지고 다 나왔죠. 그런데 이제 그 40일 동안에 제가 상당히 시달렸죠. 그러는 거예요. 우리 상급단체 우리 위원장이 저를 불러다가 설루 위원장 김문수랑 가깝더니 혹시 포섭되지 않았어?

00:17:23
이제 결과가 나오기 전이니까. 아 간부들하고 이렇게 하더니 무슨 말을 하지 않았어. 그래서 전영우. 후보가 막 소문을 막 내고 다닌 모양이다. 설량영이나 내 거다 이러고. 아니 그런 것보다 이제 자기들이 눈으로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니까 같이 우리가 이제 활동하고 그러니까 그게 눈에 보이는 거죠. 네. 그러면서 그래서 전영우 그런 건 아니고 그리고 제가 이제 워낙 무슨 뭐 이성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저는 그냥 오로지 우리 노동조합을 위해서. 또 우리 김문수 위원장이 또 근로기준법 노동법 이런 걸 잘 가르치니까 서로 계속 교류를 한 거죠. 그래서 저는 아니 김문수가 말이지 간첩이라고 이런 식으로까지 그렇게 파다가 됐었어요. 그래서 아주 그냥 분위기가 완전히 이상하게 돌아왔던 거죠. 그러다가 40일 만에 전부 그냥 무혐의로 돌아왔단 말이죠. 그래가지고 이제 40여일이 지난 후에 그 회사에서는 해고를 시켰어요. 도로코에서 해고를 시키니까 그 현장에 있는 조합원이 그때 아마 300명 400명 됐을 거예요. 해고를 시키니까 조합원들이 그 사업장 안에서 위원장을 가운데 앉혀놓고 빙 둘렀어요.

00:18:41
농성을 하면서 부당해고니까 복직을 시켜라. 그러면서 거기다가 요구 조건을 몇 개를 걸었죠. 임금 이상 삼십 프로 그리고 이제 기타 사업장에서 요구할 수 있는 몇 가지를 해서 그 일주일 동안 왜냐하면 중간에 누가 채워야 할 수 없게끔 일주일 동안은 두고 계속 투쟁을 한 거예요. 밥도 먹지 않고 완전히 거기서 이제 아주 위원장을 가운데 두고 이제 이 조합원들이 꽁꽁 둘러싸가지고. 그리고 이제 무혐의로 나오고 또 뭐 서울대 위장 취업이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인기가 그냥 완전히 그냥 이건 그냥. 갑자기 갑자기 스타가 됐어. 혜성이 된 거죠 네 혜성처럼 나타난 그런 인물이 된 거예요 그래 가지고 우리 이제 산하 각 사업장에서는 완전히 떠오르는 그냥 별처럼 이렇게 그런 존재로. 갑자기 급부상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회사와의 관계에서 조합원들의 농성을 통해서 복직과 임금 이상 30% 여타 요구한 게 100% 다 이루어진 거예요. 완전히 영웅이 된 거예요.

00:19:50
그래가지고 회사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5.18이 된 거예요. 그리고 이제 저희 지역지부 사무실에서는 몇몇 선거적인 그런 조합장들이 사무실에 모여서 지역주의보 위원장에 대한 여러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면서 농성을 했어요 저희가. 한 다섯 명 한 여덟 명인가 농성을 이제 밤낮에 거기서 했었죠. 그러고 있는데 거기 영등포 경찰서에서 정보과 형사가 왔어요. 당신 애들 지금 해산하지 않으면 전부 다 구속을 시키겠다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이제 개혐하니까 그때는 광주에서 난리가 나고 광주는 완전히 단절이 돼가지고 오고 갈 수도 없었고 그러니까 계속 와가지고 당신네들 정말 해산하지 않으면 구속을 시키겠다. 그래서 저희가 회의를 통해서 해산을 하자. 그리고 해산을 일단은 했었죠. 그리고 해산을 하고 난 후에 이제 우리 그 위원장들은 단일 노조 위원장들은 계속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서 서로 정보 교환을 하고 왜냐하면 우린 다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는데 그 정보과에서 해고된 명단이 196명이었어요. 그 당시에 금속노조 산하 각 사업장에 조금 이제 앞서서 그러면 여사님도 그중에 저도 거기에 해고자 중에 한 명 됐었죠.

00:21:14
전부 다 196명 중에 저희가 포함이 돼서 다 해고가 된 거죠. 그러고 있는 자제에 저희는 계속 모임을 하면서 서로 정보 교환을 하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것인지 그렇게 했는데 저랑 같이 이렇게 만나는데 우리 김무수 씨가 저를 상당히 외면을 해요. 외면을 하고 조금 뭐라 그럴까 말도 잘 속지 않으려고 하고 그래서 조금 또 우리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사적인 거는 사적인 거고 우리가 아주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가 앞으로 노조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5.18이 일어났는데 이 정치적인 후보가 공사 구분을 잘 못합니까?

00:22:12
얼마나 중요한 시기에 남자들이 속이 조금 밴딩이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제가 별로 기분이 그래서 우리가 같이 이렇게 회의를 하면서 계속 저한테 지속적인 어떤 보이지 않는 그런 어떤 눈치를 주면 저도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이제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제가 이제 전화를 했어요. 아니 김 위원장 우리가 공과 사를 구별을 해야지 아무리 내가 결혼을 거절했다고 해도 그런 마음을 갖고 우리가 공적으로 여러 가지 중체에 대한 시점에 나한테 그런 태도를 취하면 되겠느냐 그래서 우리가 오해를 풀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하여튼 2시간만 내달라고 그랬죠 제가 재밌죠. 완전 드라마야.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계속 우리가 그 이거를 끌어갈 수가 없잖아요. 그랬더니 딱 하는 말이 총각 처녀 만나는데 2시간이 문제냐. 200시간도 가능하다. 그래서 그래서 일단 만났죠. 그래서 이제 여러 가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이런 얘기 나가면 안 되는데 밴댕이 소가지라고 이제 이 얘기하면 안 되죠.

00:23:44
그러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기가 설령 거절을 당했다고 해가지고 나한테 그런 태도를 보일 수가 있느냐. 앞으로 계속 우리가 지속적으로 만날 텐데 그렇게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이 볼 때도 모양이 안 좋잖아요.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피식 웃으면서. 내가 가로 밖으로 나갔었는데 다시 가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고 아주 그냥 무슨 수학 공식처럼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결혼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자. 그래서 이제 저희가 결혼에 대해서 이제 여차저차 해서 이제 결혼을 하게 됐죠. 그래서 하기 전에 사실 제가 저희가 이제 저는 전라남도 순천이고 남편은 경상도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집안에서 사실 저를 굉장히 반대를 했어요. 시댁에서. 아니 경상도에는 여자가 없냐. 전라도 여자를 데려오게. 그 얘기를 계속 했던 거예요. 우리 김문수 씨는 지역감독 이름은 전혀 없잖아요. 아니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면 되는 거지. 지역이 무슨. 문제냐 한마디로 딱 그냥 교통정리를 그냥 해버렸죠 딱 꺼내지도 못하게 그래서 이제 본인이 딱 정리를 해줬어요 여사님들 쪽에서도 반대가 있었어요?

00:25:16
그래서 제가 저희 아버님께 같이 가서 승낙을 받는다고 저희 아버님은 그때 교직에 계셔가지고 제 이름이 예쁘지 않습니까? 설 란영 성하고 이름하고 어쩜 이렇게 조합이 좋은지 그리고 제가 그때는 꽃다운 나이니까 얼마나 또 예뻤겠어요. 또 특히 저희 아버지가 저를 아주 굉장히 예뻐했어요. 그래서 저희 아버님께서 특별히 지어주신 이름인데 난초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 편안하게 살아라고 란영 그렇게 지어주셨죠. 그래서 저희 부진한테 가니까 저희 아버님께서 그랬죠. 그때는 저희가 다 해고된 상태였잖아요. 아까 얘기한 196면에서 다. 자네가 우리 란영이를 어떻게 해서 버려 먹일 거냐. 그러니까 제가 만인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인데 한 여자를 못 먹여 살리겠냐고. 큰소리로 아주 빵 쳤어요. 일단 저희 부처는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렇게 해서 사실 저희가 결혼을 하게 됐는데 결혼식 때도 저희가 제가 원피스를 입고 결혼을 했죠. 웨딩드레스가 아니고. 그리고 저희 직장 동료가 부캐를 만들어줬죠. 그런데 면사포는 그게 성당의 미사포예요. 그래서 미사포에다 그걸 일으켜서 부캐를 들었는데 왜 그랬어요?

00:26:51
돈이 없어서 그랬어요? 그래서 이제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보면 사람들이 별로 믿질 않아요. 아니 그 면사포 그 당시에 웨딩드레스 대회도 가능하고 하면 돈 조금 되면 되는데 그거 없어서 그랬겠느냐고 사람들이 별로 안 믿으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안 믿어야 돼요. 왜냐? 우리가 그냥 안 입으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형편이 어려우니까 격식을 차리면서 결혼하기는 굉장히 힘든 시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자기가 깨끗하게 옷차림을 해서 아무런 비용 크게 들지 않고 그냥 있는 옷 자연스럽게 사랑만 있으면 되니까 이렇게라도 결혼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자. 그리고 이제. 한 몇 십 년 앞서가셨네 요즘 다 작은. 사십이 년 앞섰거든요. 그리고 이제 그때 저희가 원피스를 입고 같이 손을 맞잡고 들어갔어요. 그거는 우리가 아무래도 이제 사회활동을 하니까 이거는. 가정에. 민주화와 남녀평등. 네. 친정아버지가 이렇게. 네. 없었어요. 되게 섭섭해 하셨겠는데. 그거보다는 우리가 손잡고 같이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00:28:09
그래서 이제 여러분께 또 보여드려야 되잖아요. 누구라도 이렇게 그냥 마음만 있으면. 아무런 어떤 결식 차리지 않고 편하게 결혼할 수 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근데 그때 가짜 결혼식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 직전에 명동성당에서 그 일이 있었죠 두 분 다 해고된 노조위원장이고 또 남영동 분실에 40일이나 갇혀있다 나오고 그러니까 이것도 위장결혼식일 가능성이 많다 이게 결혼식으로 위장해서 시국선언 발표하고 대모하려고 그런다. 경찰들이 엄청 많이 왔더니. 처음에 저희는 몰랐어요. 처음에는 모르고 그 결혼 그 예식장도. 저희 주례를 봐주신 한달수 대한전선 노조 위원장님이셨어요. 그분이 그 교회의 장로님이셨거든요. 또 이제 자기 우리가 또 비용이 그러니까. 교회 교육관에 와서 그냥 간단하게 예식을 하는 게 좋겠다 해서 저희가 이제 예식을 하는데 들어갔는데 그 좌석이 많지는 않아요 교육관이 뭐 그렇게 많겠어요 근데 보니까 앞에 뭔가 느낌이 좀 그런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어요 물론 현장에 우리 노동자들도 축하하기 위해서 많이 왔었죠

00:29:25
그런데 뒤에도 서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앞에 딱 이렇게 전부 다 차지를 하고 있는데 이제 낯선 얼굴들이 그래서 그때는 뭐 크게 경황이 없어서 그걸 염두에 크게 두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고 그 다음에 알았어요 사실 저희가 봉천 사거리에 서울도 있고 그 교회가 서울도 있고 대료변에 있는 교회예요 근데 보니까 보이지 않는 옆으로 그 대료변에다가 지금 정경차 닭장차 닭장차 그거를 다섯 대를 갖다 놨어요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가 결혼을 해서 아참 무슨 싸인을 하면 동시에 이제 각 노동자들이 그냥 거기서 이제 시위를 한단 말이에요 그때 시위가 다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 차 안에 전부 다 전경들이 전부 다. 뭐라 그럴까 들어있었던 거고 근데 우리는 그 당시에는 몰랐고 후에 이제 직후에 바로 얘기를 이제 들었는데 그리고 이제 결혼식 끝나고 그래서 이제 그 당시에 우리가 했던 그 스몰 웨딩이 상당히 사십이 년 앞서가는 그런. 그분이 결혼하시면은 이제.

00:30:39
한 집에서 생활하셨을 거 아니에요? 네.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처음에는 저희 방 한 칸 세를 얻었는데 그때는 형님께서 한 칸이죠. 그때는 형님께서 조금 지원해 주시고 제가 그때 회사 퇴직을 했기 때문에 퇴직금 일부를 거기에 같이 합쳐서 세를 얻어서 그렇게 생활했었죠. 화장실도 안에 있고? 화장실은 이제 그 주인 사용하는 화장실을 제가 같이 사용하고 그냥 주방 방을 올라가는 바로 거기가 조그마한데 방으로 올라가는데 딛고 올라가는 데가 거기가 주방이고 방 한 칸이고 그랬었죠. 그 이제 김은수 후보가 이제 장인 되실 분한테 내가 만인을 먹여 살릴 사람이 내 여자 하나 못 먹여 살리겠다 이렇게 해서 이제 허락을 받으셨다고 그랬잖아요. 그래 지금까지 사십이 년 동안 먹여 살려는 종류가. 여러 가지 이제 어려움이 많았죠. 오히려 이제 제가. 그 당시에 이제 조그맣지만 서울대 입구에서 서점을 하면서 제가 아무래도 서점을 운영하면서 한 10여년 동안

00:32:00
이제 일정하게 제가 또 이해심이 하여 같지 않습니다. 사회의 좋은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도록 좋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가 또 이해도 하고 또 참 제가 일선에서 뛰지는 못하지만 제목까지 뛰어주 하면서 제가 네. 이번에 후보들 일곱 명이 후보 등록을 했는데 보니까 무소속의 한 후보 를 빼면 김은수 후보 재산이 꼴찌더라고요. 네. 10억 얼마. 네. 근데 그것도 대부분은 우리 여사님이 일해서 버셔서 하나하나 쌓아놓은 그 돈인 것 같던데. 그렇죠.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죠. 저희 이제 김무수 후보 같은 경우는 이제 돈을 굉장히 무서워해요. 그리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고 돈 자체에 대해서 굉장히 거리를 두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거에 책을 쓸 때도 책 안에 아마 그게 있어요. 국회의원은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일을 걷는 사람하고 똑같다. 잘못하면 교도소로 가는 거고 잘못하면 밖 떨어져. 그러면서 본인이 돈하고 굉장히. 뭐랄까 일부러 거리를 뒀었죠 그리고 이제.

00:33:17
아마 그게 어릴 때 자라면서 하나의 몸에 대한 습관이라 그럴까요 유교 집안의 그런 양반적인 기질이랄까요. 더러운 돈을 내가 만지는 건 이건 아니다 이거는 뭐 늘 아주 자기 자신을 청빈하고 깨끗하고 아주 그냥 고고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리려고 했던. 그런 것들이. 여사님 말씀하시니까. 제가 저 김은수부랑 형아하고 지낸 게 한 사십 년 됐는데요. 한 번도 아직 나한테 밥을 사거나 차를 사. 아니 그리고 뭘 먹자 그러면 꼭 저 만 원 이하 백 반만 먹고. 돈이 없었을 거예요. 실제로 돈이 없었다니까. 하여튼 그렇게 사셨어요. 근데 그런데 저 집 한 작년인가. 그래도 고 박사는 나는 지분이 있어 그러더라고요. 봉천동에 국민주택형 아파트 하나 있어요. 그걸 그렇게 자랑하던데요. 공기 때문에 자랑했을 거예요. 집은 오래돼서 볼 품이 별로 없지만. 봉천동에 있습니까? 서울대 후문에서 이쪽으로 봉천동으로 넘어오는 길에 사직터널이 있거든요. 터널 지나 바로. 그래서 거기서 이제 바로 관악산이 5분 거리기 때문에 그래서 더 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까워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00:34:38
공기도 좋고. 그 아파트는 어떻게 마련하셨어요? 저희가 처음에는 집이 있었죠. 한신아파트라고 부천 소사에. 저희가 서울에 있다가 부천 소사에 공천을 받아 갔지 않습니까? 그때 저희가 서울에 있는 전세집. 전세집 뺐을 거 아니에요. 서울에 있는 전세집을 빼니까 부천에 거기 32평 집을 사는 게 되더라고요. 전세집 가지고 그리고 조금만 더 보태니까 그래서 그때 32평 집을 이제 샀는데 저희가 이제 대구 간다고 대구를 갈 때 그 집을 다 팔았어요. 팔고. 대구에 가서 집을 샀는데 대구에 가서 집을 저희가 샀는데 그 집을 또 팔고 이제 다시 서울시장 선거에. 그러면서 그 돈이 이제 조금 있었던 거예요 한 삼억 정도가. 3억 가지고 서울시에서 집을 산다는 건 전세값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저희 동생 또 이래서 이제 돈을 좀 이렇게 보태서 그 돈을 가지고 그 돈이 한 4억 5천 정도 됐죠. 저희 돈을 포함을 해서. 그래서 그 돈을 가지고 서울 전역을 우리 사이랑 같이 돌아다녀가지고 그 집을 살 수가 없어요.

00:35:56
그래서 인제 그 조금 더 더 올라가서 그 집이 그 당시에는 집값이 최고 정점에 오르던 그 시기였죠 아마 그래서 인제 보니까 그 집이 딱 하나가 남아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비록 그게 상당히 올라가지만 집이 굉장히 정갈하고 주변이 깨끗하고 바로 길만 건네면 관악산 있고 집이 딱 한 채. 그래서 그게 이제 어머 이게 우리 집인가 싶어가지고 그래서 그 집을 여사님도 그 집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저 좋아해요 그 집을 평수는 작고 상당히 올라가고 비록 지금 24, 5년 됐어요 그 집이 그래도 집이 그냥 이 분위기가 정서적으로 제가 그런 분위기를 좋아해요 아주 시골스러운 그 잔디 화단 뭐 이런 것들이 아기자기한 그런 것들이 제가 좀 아기자기하게 생기지 않습니까? 제가 아기자기한답니다. 네. 깨끗하면서 제가 또 왕 깔끔이에요. 네. 그래서 아주 이제 그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아빠들은 조금 좁은 게 방안인데 우리가 욕심을 부리면 이제 한정이 없죠.

00:37:06
그래서 저는 늘 제 생활 신조어가 역시 위보다 아래 제가 노조할 때도 사실 그랬거든요. 여자들은 다 똑같잖아요. 또 예뻐 보이고 싶고 뭔가 좀 사치도 하고 싶고 다 똑같죠 우리가 모든 인간은 다 똑같아요. 더 놀고 싶고 잘 살고 싶고 돈도 많아 많고 자기 뭐 즐기고 싶고 그렇지만 제가 노조 위원장을 하니까 우리 노조원들 눈치를 보게 돼요. 제가 어디 가더라도 뭐 위원장이랍시고 예쁘게 꾸미고 말이지 뭐 화장하고. 이렇게 하면 우리 노조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위원장을 저렇게 예쁘게 하고 저렇게 예쁜 옷을 입고 어디를 가시나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래야 제가 의식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더 낮은 곳에서 더 뜨겁게는 여사님이 만든 슬로건이에요. 둘이 본인이 만들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그런 자세를 늘 절제를 하고 늘 절제를 하고 그 사람들하고 같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했으니까 절제의 세월을 살았다고나 할까요 자녀가 딸이 결혼해서 딸도 사실 저희가 우리 고 박사님 잘 아시겠지만 운동권이라는 게 그 당시에는 언제 어느 때 내가 행불이 되거나 죽을지 몰라요.

00:38:28
그렇죠. 왜냐하면 저희가 활동할 때도 정말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학생들도 있었고 눈으로 다 저희가 목격을 했어요. 1년에 한 3, 40번의 의문사가 발생했던 그때예요. 그렇게 저희가 정말 운동하려면 자기 목숨을 내걸고 하던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칠십 년 말 팔십 년대 초 그래서 이제 사실 운동을 한다는 것은 지금은 많이 퇴색. 돼있죠. 386 486 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안 했어요. 왜냐면 가족을 책임을 지면은 벌을 먹여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들 솔로로 이렇게 독신으로 계속 나는 평생을 내가 운동을 해야지. 그런 사람들이 결혼을 안 했어요.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은 아이를 갖지 말아야지. 둘이서. 아이를 가지면은 아이를 하나만 가져야지. 나름대로의 그런 원칙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저희는 뭐 생활 근거지도 있잖아요 서점 그리고 결혼까지 했지요 아이까지 낳았지요 그러니까 이제 아는 사람들한테는 저희가 사실 눈치가 보이죠 그래 김문수 설라뇨 그래 너희들은 결혼도 하고 생계의 수단 서점도 있고 그래 아기까지 낳았고 그래.

00:39:34
완전히 뿌띠부르지 그때의 빚이라고 그랬잖아요. 뿌띠부르지 아주. 우리는 이제 그런 식으로 또 삼자가 운동하는 사람이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제가 이제 어느 날 우리 그 시댁에서 아 문수 같은 아들 하나 낳으라고 문수 같은 아들이 뭐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문수 같은 아들 하나 낳으라고 딸이 있으니까. 저는 조금 이제 속으로 거부감이 늘지만 그래도 얘기는 했죠 저렇게 그냥 형님들이 아들 문수 같은 아들 낳으라고 그러는데 그랬더니 막 화를 버럭 내더라고요 아니 결혼도 안 하고 결혼해도 아이도 갖지 않고 생계수단 아무것도 없이. 다들 지금 나라를 위해서 그 지금 이렇게 애국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아이가 딸이 하나 있는데 무슨 소리냐 애를 하나 더 갖는다는 것은 이건 완전히 반역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아주 그냥 화를 내요. 근데 제가 거기다 대고 뭐 그래 내 생각도 같다. 그렇죠 제가 뭐 자기네 시댁에서 원해서 한 번 슬쩍 그냥 우러떼었던 건데 나한테 그러니까.

00:40:49
그냥 알았다고 그리고 저는 딸이 하나. 그러셨구나. 그 따님이 사회복지사죠. 사회복지사를 맨 처음에 선택할 때도 저희 딸이 영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영어과를 선택하려고 했더니 또 본인이 자기 생각을 또 주입을 시키는 거예요. 김문수 후보가. 아니 그건 아닌데. 꼭 딸은 딸의 인생이 있지. 동주야 사회복지과라는 게 얼마나 숭고한. 관절 아니야. 이 사회복지라는 게 정말 인간을 위한 사업이다. 다른 건 인간을 위한 그리고 얼마나 인간에 대한 정말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간을 대하는 그 사업이기 때문에 너무나 이거는 숭고한 사업이다. 그래서 이제 딸을 설득을 시켰어요. 동주가 넘어갔구나. 동주가 이제 그래서 사회복지과를 선택을 해서 물론 지금 우리 사위를 거기서 사회복지과에서 우리 딸이 거기서 이제 사위를 만난 거죠. 그래서 이제 선택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위도 사회복지사로. 그렇죠. 지금 어디서 사회복지 활동하세요? 지금 이제 저희가 저희 딸하고 사위가 주간보호센터를 준비를 했어요. 그래서 4월 초에 원래 이거를 오픈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저희 인생이 뜻하지 않는. 이런 상황이 발생이 돼서 지금 잠깐 6월 이후에 그때 하는 걸로 그렇게 하고 있죠. 그렇구나. 따님이 아버지의 권유 또는 세뇌에 의해서 사회복지사로 직업을 정한 데 대해서 혹시 후회하거나 그런 적 없어요? 그런 적은 없고요. 우리 딸도 아빠를 많이 존경하니까 아빠에 대해서는 아빠의 뜻을 본인이 아무래도 선택해서 그렇지 거기서 계속 우기거나 그러지는 못한 거 아닙니까? 본인도 또 거기 반은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요.